맨위로가기

흘해 이사금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흘해 이사금은 신라의 14대 이사금이다. 310년에 즉위하여 356년까지 재위했다. 재위 기간 동안 가뭄 피해를 복구하고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벽골지에 물을 대는 사업을 시작했다. 왜와의 혼인 요청을 거절하면서 외교적 갈등을 겪었으며, 백제와는 사신을 보내 국교를 열었다. 아들이 없어 석씨 왕통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흘해 이사금 - 천성산
    천성산은 경상남도 양산시에 위치한 산으로, 과거 원효산이라 불리던 제1봉과 천성산이라 불리던 제2봉이 합쳐져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원효대사와 관련된 전설과 함께 원적산이나 소금강으로도 불렸다.
  • 흘해 이사금 - 벽골제
    벽골제는 백제 시대에 축조된 한국 최대의 고대 저수 시설로, 신라와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수축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경지화되었고 현재 일부 제방과 수문이 남아 그 규모를 짐작게 하며 저수지인지 방조제인지 논쟁이 있다.
  • 356년 사망 - 은호 (동진)
    은호는 동진 시대 건무장군과 양주자사를 지낸 인물로, 환온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되어 북벌을 시도했으나 실패 후 실각하여 유배 생활 중 사망했다.
  • 356년 사망 - 대 안토니우스
    대 안토니우스는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사막에서 금욕적인 은수 생활을 하며 악마의 유혹을 이겨낸 초기 기독교의 성인이자 "수도원 제도의 아버지"로 불린다.
  • 월성 석씨 - 벌휴 이사금
    벌휴 이사금은 신라의 제9대 이사금으로, 아달라 이사금 사후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으며 활발한 정복 활동과 백제와의 교전, 군주 제도 마련 등의 업적을 남겼고, 그의 후손들은 신라 왕위를 이었다.
  • 월성 석씨 - 탈해 이사금
    탈해 이사금은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가 전해지며, 남해 차차웅의 사위가 되어 대보를 지내다가 유리 이사금 사후 왕위에 올라 왜, 백제, 가야 등 주변 세력과 외교 및 군사적 갈등을 겪으며 영토 확장에 힘썼고, 김알지를 발견하여 신라 김씨 왕조의 기원을 마련했으며, 80년에 사망했다.
흘해 이사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이사금
흘해(訖解)
다른 이름석욱(昔郁)
로마자 표기Heulhae Isageum
즉위
즉위년도310년
퇴위년도356년
전임기림 이사금
후임내물 마립간
가계
부왕각간 석우로
모후명원부인(命元夫人)
배우자공한, 공주의 모후
자녀석공한, 공주
생몰
출생249년? 또는 253년?
사망356년 4월 (103~107세?)
기타
능묘전 흘해왕릉 천성산 기슭에 대석마을에 흘해왕릉이라 전해지는 무덤이 있다.

2. 생애

흘해 이사금의 출생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 따르면, 석우로가 사망한 249년 혹은 253년에 갓난아기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석우로와 흘해 이사금의 연대 차이가 커서 그의 아들이 아니라 후손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석우로일본에서 사망할 당시 흘해가 갓난아기였다면, 310년 즉위할 때 흘해의 나이는 61세 또는 57세가 된다. 유복자로 보더라도 즉위 당시 나이는 60세 또는 56세가 된다. 그러나 즉위한 해에 신하들이 "흘해는 비록 어리지만 경험이 많고 나라를 잘 다스릴 덕이 있다"라고 논의했다는 기록이 있어 연대상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311년 정월 급리(急利)를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312년 왜 왕이 혼례를 요청하자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314년 급리를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317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죄수들을 심사하여 석방하였고, 318년에는 가뭄 피해를 복구하고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전국 백성의 노역을 금지했다. 330년 처음으로 벽골지에 물을 대기 시작했는데, 이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

337년 음력 2월 백제에 사신을 보냈다. 344년 음력 2월 왜 왕이 다시 공주와의 혼례를 청하자 이미 결혼하였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345년 음력 2월 왜 왕이 국교 단절을 선언하는 사신을 보냈고, 346년 군사를 크게 일으켜 금성을 포위했다. 신라군은 금성에서 농성하며 왜군의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왜군이 퇴각할 때 기병을 내어 격퇴하였다.

3. 치세

311년 정월 급리(急利)를 아찬으로 임명하였다. 314년 급리를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317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어 죄수들을 심사해 석방하였고, 이듬해 318년에는 지난해 가뭄 피해를 복구하고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전국에 백성을 부려 노역시키는 것을 금지했다. 330년 처음으로 벽골지에 물을 대기 시작하였는데, 이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4]

312년 왜왕이 혼례를 요청하자, 아찬(6등관) 급리[2]의 딸을 보냈다. 344년에도 왜국은 사자를 보내 통혼을 요청했지만, 이번에는 딸이 시집갔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 때문에 다음 해인 345년에는 왜국이 국서를 보내 국교가 끊어졌고, 346년에는 왜국이 풍도를 습격하고, 더 나아가 수도 금성을 포위 공격했다. 흘해 이사금은 출격하려 했지만, 이벌찬 강정의 진언에 따라 왜군의 피로를 기다려, 식량이 떨어져 퇴각하려던 왜군을 추격하여 패퇴시켰다.[3]

337년 2월에는 백제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열었다.

재위 47년에 356년 4월에 훙거했다. 매장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아들이 없었기에 왕위는 김씨로 넘어가, 흘해 이사금은 석씨 왕통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3. 1. 왜와의 관계

312년 왜왕이 혼례를 요청하자,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2] 344년 왜왕이 다시 공주와의 혼례를 청하였으나 이미 결혼하였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3] 이에 345년 왜왕이 국교를 끊는다는 사신을 보내고, 346년 크게 군사를 내어 금성을 포위했다. 신라군은 금성에서 농성하며 왜군의 식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왜군의 퇴각 시점에 맞춰 기병을 내어 격퇴하였다.[3]

3. 2. 백제와의 관계

337년 음력 2월 백제에 사신을 보내 국교를 열었다.[3]

3. 3. 내정

311년 정월 급리(急利)를 아찬으로 임명하였다.[2] 312년 왜왕이 혼례를 요청하자,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2] 314년 급리를 이찬으로 임명하였다.

317년 봄과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어 죄수들을 심사해 석방하였고, 이듬해 318년에는 지난해 가뭄 피해를 복구하고 농업을 진흥시키기 위해 전국에 백성을 부려 노역시키는 것을 금지했다. 330년 처음으로 벽골지에 물을 대기 시작하였는데, 이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4]

4. 가계

흘해 이사금의 조부는 내해 이사금이며,[6] 조모는 석골정의 딸이다. 아버지는 각간 석우로이며, 어머니는 조분 이사금아이혜부인의 딸인 명원부인 석씨이다.[6]

5. 사망

참조

[1] 뉴스 https://www.yangsani[...] 2020-11-26
[2] 문서
[3] 서적 三国史記
[4] 문서
[5] 웹사이트 천성산 기슭에 대석마을에 흘해왕릉이라 전해지는 무덤이 있다. http://yssnews.co.kr[...]
[6] 문서 내해 이사금의 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